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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으로 - 이정하 낮은 곳으로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 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벅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 오라.
사랑의 물리학 - 김인육 사랑의 물리학 김인육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축혼가 - 요시노 히로시 축혼가 요시노 히로시 두 사람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어수룩한 편이 좋다. 너무 훌륭하지 않은 편이 좋다. 너무 훌륭하면 오래가지 못한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완벽을 지향하지 않는 편이 좋다. 완벽 따위는 부자연스럽다고 큰소리치는 편이 좋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인가 장난치는 편이 좋다. 발랑 넘어지는 편이 좋다. 서로 비난할 일이 있어도 비난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었는지 나중에 되돌아 봄이 좋다. 바른말을 할 때 조심스레 하는 편이 좋다. 바른말을 할 때 상대를 마음 상하게 하기 쉽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훌륭해지고 싶거나 올바르고 싶다고 마음 쓰지 말고 천천히 느긋이 햇빛을 쬐고 있는 편이 좋다. 건강하게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 있는 것의 그리움에 문득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날이 있어도 좋다. 그리고 어째..
행복 - 유치환 행복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당신 하나 건졌네 - 김성백 당신 하나 건졌네 김성백 송곳은 시들시들 서슬은 흐늘흐늘 심줄은 꾸덕꾸덕 차 떼이고 포 떼이고 때만 쌓인 인생의 나이테 아스라이 갈피를 잃어가도 괜찮은 인생이야 당신 하나 건졌네 그거면 됐네 다 가졌네
사모 - 조지훈 사모 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5분 - 엄마가 5분 엄마가 (2021 시민공모작) 이 글 보면 잠시만 전화해주라 5분만 목소리 들으면 좋겠다 얼굴 보면 더 좋겠네 도착하기 5분 전에 말만 해 된장찌개 맛있게 끓여놓을게 그러니까 네 시간 5분만 엄마한테 주라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