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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요약 정리

말하다 (요약 정리)

한줄요약: 김영하 클라스


p.21: 소설이라는 게 원래 실패에 대한 것이다. 세계명작들을 보라. 성공한 사람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기껏 고생해서 커다란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 상어들에게 다 뜯기고 뼈만 끌고 돌아온다.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와 [마담 보바리]의 보바리 부인은 자살하고 만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옛사랑을 얻기는커녕 엉뚱한 사람이 쏜 총에 맞아 젊은 생을 마감한다. 문학은 성공하는 방법은 가르쳐줄 수 없지만 실패가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다는 것, 때로 위엄 있고 심지어 존엄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니 인생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소설을 읽어라.

 

 

 

 

p. 23: 세상을 바꾸기도 어렵고 가족을 바꾸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이다, 자기계발서들이 말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 자신이라도 바꿔라. 저는 그것마저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바꾸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게 쉽다면 그런 책들이 그렇게 많이 팔릴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p. 27: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관적 현실주의에 두되, 삶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기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타인에게 동조될 때, 경계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새로 나온 사진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카메라로 더 멋진 사진을 찍는 삶입니다. 새로운 스마트폰을 사는 삶이 아니라 휴대폰을 잠시 끄고 글을 쓰는 데서 얻는 즐거움을 말합니다.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의 대부분은 인류가 오랫동안 쌓아온 유산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술과 관련되었다는 겁니다. 글을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연극에 참여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 여기엔 대부분 큰돈이 들지 않습니다. 성장률이 제로로 수렴하는 저성장 시대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툭하면 0퍼센트의 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이민자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그런 일을 겪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많이 벌고 많이 쓰고 많이 저장하는 삶은 더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비관적 인식하에 지금 여기에서 어떤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를 개인적으로, 독자적으로, 개별적으로,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p.33: 예전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 '오감으로 글쓰기'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어렸을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쓰게 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학생들이 시각적인 기억에만 의존해 건조하게 묘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오감을 다 표현해 다시 써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함께 남해안의 해수욕장에 놀러간 기억에 대해 쓴다면, 저 먼 수평선에 갈매기들이 날고, 그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우는 소리를 들으며 바다로 걸어들어갔는데, 해초가 종아리에 미끈거리며 감기고 수영을 하며 들이킨 바닷물은 엄청나게 짰다, 이런 게 오감의 글쓰기인데요. 일단 오감을 이용해 글을 쓰면 글 자체가 좋아집니다. 게다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그냥 시각만 이용해서 글을 쓸 때보다 훨씬 깊게 그때의 경험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쓰다가 갑자기 눈물을 쏟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여러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글을 쓴다는 것은 간접적인 행위이지만 오감을 동원하면 그것을 마치 놀라운 가상현실처럼 우리에게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그런 글쓰기가 습관이 되면 일상생활에서도 더 민감하게 오감을 동원하게 됩니다. 감각과 기억, 표현은 이렇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감성 근육을 키우는 것입니다.

 

 

 

 

p.120: 글을 잘 쓰는 법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물어보시는데, 저는 다른 사람의 글을 볼 때는 단순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이야기가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에요.

(중략)

그 순간만큼은 자기 인생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직면해서 쓴 것이거든요. 이런 글들은 힘이 있고, 진실해요. 그래서 저는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기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 인간이 고요하게 자기 서재, 아무도 침임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p.136: 선생님이 쓰라는 주제에 대해서만 쓸 때, 아이들은 전혀 즐거움을 느낄 수 없죠. 그렇다면 결국 금지된 것을 써야 해요. 선생님이 쓰지 말라는 것을 써야 합니다. 저는 가끔 학생들에게 그렇게 얘기했었습니다. 책상 서랍에 숨겨놓을 수밖에 없는, 그런 글을 써라. 부모가 보면 안 될것 같은 글. 반대로 말하자면, 부모한테도 보여주고 싶고 선생님한테도 보여주고 싶은 글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죠.

 

 

 

 

p.140: 작가에게 독서는 그런 의미에서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읽어보고 중요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지요. 내가 정말 알고 싶었거나 답변을 듣고 싶었으나 지금껏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것이 있는가? 그것을 나는 새롭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런 문제들을 고민하기 위해 작가는 늘 서가를 둘러보고 그 안에 넣고 싶은 책을 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작가로서 그런 야심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p.236: 무라카미의 소설에서는 일본 사소설의 강력한 전통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부분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명백히 미국문화, 특히 재즈 같은 미국적 음악을 좋아하고 서구적 문화 기호로 가득한 소설을 쓰고 있지만 그게 쓰는 작품들은 무척이나 일본적이기도 합니다. 이 이상한 혼종문학이 전 세계 서점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의 소설은 '잘 써서'가 아니라 '이상하게 쓴' 덕분에 그토록 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 TV드라마가 '아시라르 평정'한 것도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이상하게 만들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 '더 잘 만들어서' 한류를 지속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소설은 여러 문화의 혼종을 통해 빚어진 변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돌연변이의 산물이기 때문에 미리 에측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고, 기획하여 생산하는 것도 어려울 거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게 만약 실현된다면, 그 주인공은 아마도 한국의 정서를 잘 살린 문학이 아니라 이상한 것, 어지럽게 뒤섞인 것, 도저히 우리가 한국문학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정말로 한류를 지속시키기를 원한다면 더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이상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p.245: 여전히 나는 말보다는 글의 세계를 더 신뢰하며, 그 안에서 내 생각이 더 적확하게 표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