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평: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역사와 가이드. but 결국 의미는 내가 찾아야 하는 것
p.14: "인간은 자신의 실존을, 풀어야 하며 벗어날 수 없는 문제로 삼는 유일한 동물이다." -에리히 프롬
p.16: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학생처럼 삶에 관한 결론들에 도달한다. 그들은 스스로 답을 찾아내지 않고 책에서 답을 베껴와서 선생을 속인다." -키르케고르
p.17: "지금 당신의 질문들을 살아내라. 그러면 먼 훗날 언젠가 어쩌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당신의 삶은 당신의 답들에 진입할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로써 나는 말하자면 지적인 세계의 작은 모형 하나를 나의 발견 능력이 닿는 한도까지 참되고 성실하게 제시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p.22: 나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어쩌면 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오로지 그 질문만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또 그 질문을 생각하지 않으면, 고귀한 일을 할 수 없다거나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최악의 경우에는 그 질문을 너무 많이 생각한 탓에 강박적인 분석 습관이 생겨 결국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다. "성찰하면서 살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했지만, 지나치게 성찰하면서 사는 삶도 틀림없이 살 가치가 없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삶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삶이 너무 짧을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살고, 그 다음에 철학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많은 이들이 의미에 대해서 숙고하지 않고도 행복한 삶을 살아왔고, 의미에 대해 숙고했더라도 그 질문에 답을 얻지 않고도 좋은 삶을 살아왔다. 철학자는 철학적 숙고의 중요성을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질문은 숙고를 요구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잠정적인 답이 없다면, 어떤 행동도, 심지어 살아갈 이유조차도 궁극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을 듯 하다. 약간 다르게 표현해보자. 당신이 삶의 의미를 모른다면, 당신은 대체 왜 사는가? 당신이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면, 당신은 왜 행동하는가? 살아갈 의지나 자기보존 본능이 있기 때문에 산다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답은 당신이 삶을 이어가는 이유를 설명할 뿐, 삶을 이어가야 할 이유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물론 당신은 이런 질문들을 숙고하지 않아도 삶을 이어갈 수 있으며, 많은 이들은 환경의 강제에 떠밀려 생존을 위해 노력하느라 철학적 성찰에 쓸 시간이 거의 없다. 그러나 충분한 여가시간을 가진 사람들,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킨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나아가 일반적인 삶의 의미를 생각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의미에 대한 질문을 숙고하는 것은 확실히 가치 있는 일이다.
p.101: 철학적 문제들이 난해한 것은 그것들이 신성하거나 환원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거나 흔해 빠진 과학이서서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정신이 그것을 풀 장치를 갖추지 않았기 대문이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유기체이며, 우리의 정신은 진리와 연결된 파이프라인이 아니라 기관(organ)이다. 자연선택에 의해 우리의 정신은 우리 조상들에게 목숨이 걸린 사안이었던 문제들을 풀도록 진화한 것이지, 진위를 따지거나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임의의 질문에 답하도록 진화한 것이 아니다. -스티븐 핑커
p.128: 신들이 존재하고, 신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우리를 창조했고, 우리가 그 목적을 알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질문은 이것이다. 앞의 가정들이 모두 참임을 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것들이 우리의 삶에 의미를 제공할까? 예컨대 신의 계획에서 우리의 역할이 하찮다고 해보자. 이를테면 식물을 위해 이산화탄소를 공급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만족할까? 아니다. 아마 당신은 당신의 역할이 더 중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 역할이나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하찮은 역할은 용납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의 역할이 '긍정적이고, 심지어 자랑스럽기를' 바란다.
p.162: 카뮈는 유일하게 중요한 철학적 질문은 자살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주장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목숨이 위태로울 때 사람들은 대개 그런 주장을 포기한다. 반면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을 때는 실제로 죽는다. 혹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들을 위해서도 죽는다. 이 사실은 의미에 관한 질문이 다른 모든 과학적 철학적 질문들을 대체함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나는 삶의 의미가 가장 절박한 질문이라고 결론짓는다."
p.163: "내 안에 있는 이 마음을 나는 느낄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 세계를 만질 수 있고 이 세계가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나의 앎은 거기에서 끝난다. 나머지는 창작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나 자신도 잘 모른다. "나의 것인 바로 이 마음은 나에게 영영 정의할 수 없는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나의 존재에 대한 나의 확신과 내가 그 확신에 부여하려 애쓰는 내용 사이의 간극은 끝내 메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나 자신에게 이방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느낀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앎은 거기에서 끝난다.
p.178: 카뮈가 보기에 인간은 우주적 질서, 자신이 하는 노동의 중요성, 지적인 삶을 원한다. 그러나 삶은 질서가 없고 우리의 업적을 파괴하며 우리에게 낯설다. 한마디로 우리가 원하는 것들(우리를 배려하는 우주, 우리와 연결된 우주, 우리가 그 안에서 불멸하는 우주)은 정확히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얻는 것은 죽음 뿐이다. 인간이 원하는 것들(불멸)과 인간이 얻는 것(죽음)사이의 이러한 대립이 부조리의 출처다.
일해서 번 돈으로 음식을 사먹고 또 일하는 끝없는 순환도 부조리하다. 우리는 B를 위해 A를 하고, C를 위해 B를 하는 식으로 무한정 어떤 다른 것을 위해서 현재의 활동을 한다. 이 활동들이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카뮈는 우리가 이 모든 활동을 어쩔 수 없이 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많은 동물들의 삶도 부조리하다. 동물들은 번식하고 나서 죽는다. 동물들의 삶은 종의 존속 외에 다른 이유를 가지지 않는 듯하다. 인간의 삶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p.192: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황금률은 없다. 모든 이는 각자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p.231: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것은 커다란 질문이다. 즉,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질문이며, 가장 긴급하면서 또한 가장 불명확한 질문이다." 대개 이 질문은 삶에서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제기된다. 반면에 일상이 활동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이 질문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p.320: 새가드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랑, 일, 놀이에 가치를 둔다는 경험적 주장과 이것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규범적 주장을 연결했다. 이것들(사랑, 일, 놀이)은 유능함, 자율, 관계를 향한 기본적인 심리적 욕구들을 만족시키므로, 우리는 이것들에 가치를 두어야 하고 실제로 가치를 둔다. 심리적 욕구의 만족은 삶의 의미로 경험된다.
능력을 향한 우리의 욕구는 왜 일이 삶의 의미를 제공하고 왜 비천한 일은 일반적으로 그 의미를 덜 제공하는지 설명해준다. 또한 왜 당사자가 능숙하게 하는 놀이가 삶의 의미를 제공하는지도 설명해준다. 관계 욕구를 만족시키는 주요 방식은 친구와 가족에 대한 사랑이지만, 놀이와 일도 사랑에 못지않게 효과적일 수 있다. 자율에 대해서 말하면, 일과 놀이, 관계는 스스로 선택한 것일 때 더 만족스럽다. 이처럼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심리적 욕구(능력, 자율, 관계)들을 만족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가장 많이 제공하는 것들(사랑, 일, 놀이)과 정확히 일치한다.
p.335: 인생을 성찰할 때 슬픈 점은, 많은 이들이 고요히 길을 잃은 상태로 삶을 일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멀리 떠나서 살고 그림자처럼 사라진다. 그들의 비도덕적 영혼은 바람에 날려가고, 그들은 영혼의 불멸에 관한 질문들에 동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기도 전에 이미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
p.498: "나는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p.508: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좋은 것들에 주관적으로 관여함으로써 행복, 즐거움, 성취감, 목적, 충만감, 의미를 발견한다. 객관적으로 좋은 것들의 예를 들자면, 사랑하는 관계, 즐거운 활동, 타인을 돕기, 생산적인 일, 지식 추구, 미적 향유 등이 있다. 객관적 실재는 주체들이 의미를 창조하는 방식에 한계를 부여한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실재 속에 잠재된 의미가 실현될지 여부는 주체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의미는 의식적인 주체들이 객관적 실재 속에 잠재하는 의미를 끌어낼 때 발생한다.
p.509: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 양쪽 모두를 일궈야 한다. 그렇게 진화 서사시의 주인공으로서 우리의 역할을 끌어안고 세계 안의 지식, 사랑, 즐거움, 아름다움, 좋음, 의미의 양과 질을 늘리고 반대되는 것들을 줄이는 일에 나서야 한다.
p.511: 이 책을 돌이켜보면, 철학적 고민의 칙칙한 색조와 감각적 세계에 빠져들 때 느끼는 즐거움 사이의 현격한 대비가 충격적으로 눈에 띈다. 우리가 보는 산과 바다에서, 우리가 걷는 산책길과 먹는 밥에서, 몸을 쓰는 놀이와 철학적 대화에서 느끼는 즐거움에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였을 때 느끼는 온기에서, 우리는 의미를 발견하다기보다 의미를 향한 욕구를 초월한다. 그럴 때 삶은 그 자체로 충만하다. 우리가 웃고 놀고 사랑할 때, 세계의 모든 참상은 순각적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의미를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이 실존적 고뇌를 되살린다면? 어쩌면 우리는 덜 생각할 수 있고 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삶은 우리의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보다 더 깊다.
p.516: 우리의 행성이 무엇이고 무엇일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라.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굶주림, 지속적인 위험, 사랑보다 더 많은 증오가 있다. 행복한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 경쟁보다 협동이 더 많이 눈에 띄는 곳, 지루한 일은 기계들이 하는 곳, 하는 일이라고는 죽이는 것밖에 없는 흉측한 기계들이 들어설 자리를 위해 사랑스러운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곳, 시체들의 산더미를 생산하는 것보다 즐거움을 촉진하는 것이 더 존중받는 곳.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마라. 불가능 하지 않다. 다만 그런 세상은 고문을 가하기를 바라기보다 그런 세상을 더 많이 바라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 각자 안에 갇힌 예술가가 있다. 그를 풀어주어 만방에 즐거움을 퍼뜨리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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